[조선] 근위연대의 횡설수설 '제승방략' 1편 연대장의 역사잡설

[조선] 유성룡이 생각한 '제승방략'에 대한 잡설

 저 번에 포스팅한 '제승방략'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제승방략에 대해서 멋대로 써볼 예정입니다. 다소 몰 이해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고 지적은 매우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럼 한 번 모자란 글을 써보겠습니다. (※군제사에 대한 논문 몇 편을 주워서 읽고 쓰는 점임을 양해바랍니다.)

 -근위연대의 본격 '제승방략 ' 제 멋대로 생각하기-

 1. '제승방략 '은 언제부터 시행되었을까?

 '제승방략'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서애 선생이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서애 선생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지난 을묘년690) 변란 이후 김수문(金秀文)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으로 고쳐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변사(巡邊使)·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防將)·도원수(都元帥)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이를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4년 10월 1일 계사조-
 
 스스로 자기의 뜻대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내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당초 을묘년 왜변(倭變)을 당하자 이러한 일시의 구급책을 마련한 것이니... -선조 27년 3월 29일 정미조-

 즉 서애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명종 재위시기의 을묘왜변 뒤에 전라도 지역에서 시행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자는 을묘년 변란 이후이고, 후자는 을묘왜변 당시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서애 선생의 발언에서 나오는 '김수문'이라는 사람은 제주목사로 재직 당시 왜구 1천여가 침공해 온 것을 격파한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명종 10년 7월 6일 무술조 기사참조) 헌데 선수 24년 계사조에서는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분군법을 시행하였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찾아보니 김수문은 을묘왜변 이후 명종 13년에 경상도순변사로 파견되었으니 전라도라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명종 13년 2월 12일 경인조 참고)

 원래 실록도 잘못된 언행이라도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보니, 서애 선생의 발언 중에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을 경우도 생각해 봐야겠지요. 여하튼 제승방략에 시행에 관해서 김수문이 중요한 인물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승방략의 정확한 시행 시점이 약간 모호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금해 보아야겠지요.

 사실 제승방략이 시행되기 이전에도 '경장(京將)'이라 불리는 서울에서 파견되는 장수는 존재했었습니다. 무조건 제승방략만이 서울에서 파견되는 장수의 대명사는 아닌셈이죠. 그러므로 '제승방략'이라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파견된 경장과 지방의 지휘관들과의 명령체계등을 살펴보면서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답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승방략이 시행되기 이전에 있었던 경장의 파견을 살펴보면서 글을 전개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삼포왜란 떄에도 경장은 파견했잖아요?

 제승방략이 시행되기 이전인 중종 대의 '삼포왜란'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남도로 파견되는 경장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명령계통을 보면 재경지휘 즉 서울에 있는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도체찰사, 그리고 경상도에 도원수와 부원수를 파견하고 그 예하에 진관을 지휘하는 병사와 수사, 그리고 경장인 방어사를 두었습니다. 전라도에는 순찰사를 직접 내려보내고 그 밑에 병사와 수사, 그리고 서울에서 파견한 방어사와 조방장을 두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률적으로 떨어진 명령은 아닙니다. 조정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휘관을 교체하거나 증파하는 등 변동을 주었습니다.

 '황형(黃衡)을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로, 유담년을 우도 방어사로 삼아 각각 종사관(從事官) 두 사람과 군관 30인을 대동하고 가게 하였다. -중종실록 5년 4월 계사조-' 먼저 2인의 방어사를 임명해서 내려보내고, 중종실록 5년 4월 갑오조의 기사에서는 겸병조판서 지변사인 유순정을 도체찰사로 삼고, 안윤덕을 도순찰사로 삼도록 합니다. 여기서 유순정이 방어사 2인을 통솔하기 위해서 '유담년(柳耼年)과 황형(黃衡)이 이미 방어사가 되었으니, 또 모름지기 물망이 있는 자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서 군령을 정제하소서' 이 방어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도순찰사를 임명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죠. 이당시 경장의 임명 행위를 보면 사전에 미리 정해놓았다기 보다는 상황에 맞게 임명해서 내려보냈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마저도 전력이 모자라자 조정에서는 인선을 새롭게 꾸밉니다. 이 와중에 실록의 기록을 보니 악의적으로 생각하면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는 소재가 보이더군요.(뜬금없이 -_-;;)

빈청(賓廳)에 전교하기를,
 “오늘 경연에서 체찰(體察)을 고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유순정·성희안 중에서 누가 가야 하겠는가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자,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안팎의 의논은 모두 좌상(左相)이 가야 한다고 하나, 병이 있다고 칭하니 우상(右相)이 가야 합니다.”  하고,  권균(權鈞)은 아뢰기를, “군졸들은 모두 좌상이 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노공필(盧公弼)은 아뢰기를, “어찌 반드시 난을 당하여 사양하겠습니까. 좌상이 병이 있으면 우상이 가야 합니다.  하고,  나머지 의논은 한결같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좌·우상이 모두 병이 있다고 말하나 병에도 경중이 있다.” 하자,
 유순정·성희안이 아뢰기를, “신 등의 병을 급한 병이라 할 수는 없으나, 다만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사양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모두 좌상에게 뜻을 두고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중종 5년 4월 13일 무술조-

 앞 뒤 자르고 보면 병 핑계되고 못 가겠습니다하고 다를바 없지요. 물론 농담으로 하는 소리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십시오...^^;;; 사실 일단 지빙관 등을 임명시켜 놓고나면 그 뒤 기사가 '저는 변경의 일을 모릅니다하고 사양하였다.'는 것은 연례 행사처럼 나오더군요. ^^;;;
 각설하고, 중종 5년 4월 13일 무술조 기사를 계속 보면 빼다가 걸린(?) 유순정이 경상도도원수가 되어 방어사를 다시 임명해서 내려가고, 성희안이 도체찰자사를 맏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종 5년 4월 경자조 기사에 보면 도순찰사를 부원수로 개칭하는 모습도 볼 수 있죠. 확실히 순찰사도 도원수의 예하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경장들의 파견은 이후 을묘왜변 당시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죠. 실질적으로 을묘왜변에서 '제승방략'이 출발한다고 생각한다면 을묘왜변을 통해서 경장과 지방지휘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3. 을묘왜변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명종 10년 5월 11일에 왜선 70여척이 달량포를 침공하자 전라병사가 장흥부사, 영암군수 등과 함께 달량을 구원하러 달려갔다가 오히려 포위되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조정에는 5월 16일에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보낸 장계가 도착해서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청홍도(충청도)에도 도순찰사 및 방어사를 급파하자고 논의합니다. 그에 조정에서는 바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로, 김경석(金景錫)을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로, 남치근(南致勤)을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로, 조광원(曺光遠)을 경상도 도순찰사로, 조안국(趙安國)을 좌도 방어사로,【부임하기 전에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개정했다.】 윤선지(尹先智)를 우도 방어사로,【이날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했다.】 장세호(張世豪)를 청홍도 방어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논의들은 군정이 피폐하다거나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저번에 포스팅했던 군역의 문란, 자연재해 등등이 당시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든 것은 큰 문제대로 대두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달량, 장흥 등등이 함락되거나 약탈당하는 등 조정에서도 빨리 경장이 내려가서 조처해야 하는 등의 논의를 계속 합니다. 현실적으로 진관체제 하에서 적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죠. 본도(전라도)의 지휘관인 병사가 포위당해 전사하고, 본읍 수령중에서도 도망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왜변 중에도 경장인 도순찰사, 방어사 등등이 현지에 내려가는 것이 늦다는 것이 계속 대두되고 군사의 숫자는 적은대, 장수들은 쓸데없이 많다는 것이 거론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명종 10년 10월 18일 기묘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하명되기 이릅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금년의 왜변은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단지 전례만을 따라 도순찰사(都巡察使)와 방어사(防禦使)를 나누어 보냈는데, 길이 멀어 내려갈 때에 제때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졸은 적은데 장수만 많고 방어사와 병사·수사의 호령이 한결같지 않아서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내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병화가 있더라도 순찰사와 방어사를 별도로 보내지 말고, 양도의 관찰사에게 순찰사의 소임을 겸하게 하고 병사는 육군을 거느리며 수사는 수군을 거느려 미리 군졸을 정비하여 도내에서 즉시 대응하도록 할 것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와 병수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명종 10년 10월 18일 기묘조-
 
 즉, 경장 파견을 폐지한다는 것입죠. 사실 진관의 피폐가 계속 거론되는 것도 모자라서 명령체계마저 흔들리게 한다는 것은 조정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파악한 것이겠죠. 하지만 이 것도 다시 왜변의 기미가 보이자 경장을 다시 파견해야 된다는 둥 호돌갑(?)을 떨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관찰사로 하여금 순찰사의 임무를 띠게 하였는데 도순찰사를 파견할 수는 없기에 '순변사'로 개칭하여 경상도순변사로 을묘왜변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경상도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전라도순변사도 파견되었습니다. 전라도 순변사는 남치근이었습니다.)

 여하튼 여기까지 이야기 왔다면 이제 의문을 가지실 법도 합니다. 음, 삼포왜란부터 경장의 파견이 지속되었다면 '제승방략'의 기조가 그때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가?

 제 생각에는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경장의 명칭, 순찰사, 순변사, 방어사, 조방장 등의 파견이 제승방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승방략의 핵심은 바로 '분군법'이지 경장의 파견이라고 할 수는 없기 떄문입니다. 삼포왜란 당시의 경장의 파견이 바로 진관의 분군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니 당초 경장의 파견은 조정에서 대장 및 방어사를 보내는 것은 중앙 경군을 데리고 내려가면 해당 본도 장졸들은 질서있게 분속되나 대개 그 진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군제사 조선전기편 제승방략(분군법)의 이해에서 발췌-  라고 하는 것은 삼포왜란 당시 해당 도순찰사와 방어사 등이 내려가면 단순히 어느지역의 병력들이 해당지역에서 집결하는 형태가 아니라 각 본읍에서 대기하는 것 이상 가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사시 본읍의 병력이 해당지역에서 당해 지휘관의 지휘를 받게 하는 것은 류성룡의 기록에 따라 을묘왜변 당시 아니면 그 이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승방략이라는 것이 갑자기 나오지는 않았을테데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중종실록에 난도의 번상병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달프다는 기록에 보면

 전라도의 기병(騎兵)과 수군(水軍)을 경급(警急) 이 있으면 임시하여 보내어 분방하게 하는 일은 유순정(柳順汀)이 정한 것인데, 이들은 먼 도(道)에 있는 자가 아니므로, 평시에는 각진(各鎭)·각포(各浦)에서 유방(留防) 하고, 적(敵)이 왔으되 성(城)을 함락하게까지 되지 않았으면 적이 비록 지금 나타나 있더라도 형세가 이웃 진(鎭)에 비보(飛報)하여 그들로 하여금 와서 구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제도 원근(遠近)을 가려서 사변이 있으면 어느 도의 군사는 어느 도로 향하고 어느 고을의 군사는 어느 포 또는 어느 진으로 가라고 한다면, 합번(合番)하거나 분방하지 않더라도 적에게 대응하는 데에 기능(機能)이 있고 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유담년과 같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의논하여 정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논의들이 '제승방략'을 탄생하게끔 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결론적으로 군역의 문란으로 군정의 숫자는 줄고 진관의 유지하기 위해서 입번하는 병사들의 번기를 자꾸 늘릴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되는 셈이니 조정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겠죠.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원래 지방 진관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던 이가 경장으로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군병력 동원을 수월케 한다는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분군법'이라는 형태가 탄생되어 가는데는 저러한 논의들이 계속되었고 결국 기록상으로 김수문이라는 사람이 분군의 형태를 완성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제승방략'은 경장의 파견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북도 제승방략까지 봐야지 확실히 인지할 것 같습니다만(물론 제 기준입니다 -_-;;) 어쩃든 제승방략의 핵심은 '분군법'이고 이것이 어떻게 본도의 해당되는 각 진관에 어떠한 형태로 지시되어 있었던 것이냐가 '제승방략적 분군법' 연구에 가장 큰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경장이 파견되어 대병을 지휘한다 하더라도 분명 휘하 진관의 병력의 통솔은 본도의 병사, 수사, 그리고 순찰사 역할을 하는 관찰사가 확실히 행사했어야 겠지요. 즉, 하염없이 집결 포인트에서 경장을 바라보다 괴멸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경장 파견의 늦음은 왜변 때부터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고, 북도에서도 경장의 파견 없이 잘 운영되었는데 말이죠. 뭐 자세한 건 더 뒤로 가봐야겠지요.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편은 을묘왜변에 대한 약간의 잡설과, 북도제승방략에 대해서 써볼까 합니다. 쓰잘데기 없는 글을 끝가지 보아주신 분들에게는 감사드립니다. 틀린게 있고 거슬린다 싶으시면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덧글

  • 들꽃향기 2009/11/02 18:23 # 답글

    말씀 하신 사항에 대해서 잘 읽고 갑니다.^^ 다만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관찰사의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관찰사가 지역의 병력을 통솔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았습니다.

    첫째로는 관찰사 자체가 별도의 관아나 행정조직을 가진 유영(留營)체제가 아닌 순영(巡營)체제였었고, 둘째로는 관찰사 고유의 권한은 원래 지방관에 대한 포폄과 형옥에 대한 재검이지, 군사권이 포함된 것은 아니었으니깐요.

    이러한 문제는 결국 감사가 유영화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을 대체로 감사에게 겸직시키며, 나아가 감사가 별도로 갖추는 아병의 존재를 허용한,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비로소 관찰사가 지방군사의 통솔에 있어서 개입할수 있었지만, 임란 이전의 상황에서는 아직 힘든 얘기였습니다.

  • 근위연대 2009/11/02 19:22 #

    관찰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결점이 있었군요. 조정에서 순찰사나 순변사등을 내려보내 지휘권을 행사하게 하려고 한 원인은 그런 쪽에서 찾아봐야 하는군요.

    임진왜란 당시의 김수가 제 고을 병력을 대구에서 기다리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왜 굳이 김수가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관찰사를 조선후기 감사의 역량으로 보려고 했으니...

    관찰사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아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 들꽃향기 2009/11/02 20:00 # 답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관찰사와 군사적 기능의 격리라는 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관찰사 자체가 군사적 권한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가 된듯하여 부가적인 변(?)을 붙이고자 합니다.

    사실 경국대전상으로는 각 도에 하나씩 있는 병마절도사(단병사) 이외에도 감사와 병사를 겸하게 하는 겸임직을 포함하여, 총 15개의 병사가 전국에 존재하기에, 감사가 병사로서 지역 군대를 지휘할 권한이 아주 부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관찰사의 주된 역할은 외헌..즉 규찰의 임무가 본업이었고, 조정에서도 병권이 집중되는 것에 경각심이 있다보니, 시기와 역임한 이에 따라서 군사권을 겸임한 경우가 들쭉날쭉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실제로 지방의 군사권에서 중시된 것은 단병사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관찰사가 실제로 병마절도사로서 군사적 통솔기능을 발휘하려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행정조직이나 재정이 있고, 그를 통해서 군사를 꾸려나갈 행정기반이나 비용이 있어야 하는데, 유영체제가 아니라 그것이 부재했던 당시에 실제적인 군사 통솔은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근위연대 2009/11/02 20:06 # 답글

    네, 말씀 하신 것을 포함해서 복합적으로 좀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 관찰사에게 순찰사 역할을 맡겼다는 것을 좀 더 세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당시 관찰사의 군사적 역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쓴 본문의 내용은 경장, 병사, 수사에 대한 내용을 임명 내용과 상하관계만 표면적으로 파악해서 말씀하신 당해 지휘관들이 실제적 기능, 역량 문제 등은 아예 부재되어 있습니다. 말씀 들으니 그런 쪽으로 좀 더 봐야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거듭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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